임사홍,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타고난 간신
'新' 설왕설래의 박영기 국장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은 흔히 유자광, 신수근 등과 함께 연산군 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으로 꼽힌다. 다만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그가 처음부터 간신이었던 것은 아니며, 정치적 상황과 후대의 평가가 크게 작용했다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다.
임사홍은 공신 임원준의 아들로 태어나 세조 때 문과에 급제했다. 시문과 서예에 뛰어났고 중국어에도 능해 외교 업무를 맡았으며, 성종의 신임을 받아 도승지, 이조판서 등 핵심 관직을 역임했다.
젊은 시절에는 권신 한명회를 비판하는 등 직언도 서슴지 않는 관료였다.
임사홍 인생의 전환점은 1478년 '흙비(황사)' 사건이었다. 대간은 하늘의 경고라며 금주령을 주장했지만, 임사홍은 과학적인 시각에서 "국가 제사를 고려하면 금주령은 부적절하다"고 반대했다.
문제는 그의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사림과 대간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았고, 결국 유자광 등과 파당을 만들었다는 이유까지 더해져 의주로 유배됐다. 이 유배 생활은 10여 년 이상 이어졌다.
임사홍은 능력 있는 문신이었지만, 성종 후반 대간의 집중적인 탄핵으로 결국 오랜 유배 생활을 겪었다.
복권 이후에는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연산군에게 철저히 의존했고, 왕의 뜻을 거스르기보다 따르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그는 한때 최고의 권력을 누렸지만, 연산군의 몰락과 함께 모든 것을 잃었다.
임사홍은 왕실과 깊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장남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의 남편이었고, 넷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의 남편이었다.
특히 연산군은 휘숙옹주를 매우 아꼈기 때문에 임숭재를 총애했고, 이를 계기로 임사홍도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자신을 오랫동안 탄핵했던 대간과 사림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연산군 역시 신하들의 견제를 극도로 싫어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중종실록』은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사건을 상기시켜 갑자사화를 촉발했다고 기록한다.
이후 연산군은 폐비 윤씨와 관련된 인사들을 대거 처형하고, 사림과 대신들을 숙청했으며, 여성들을 선발하는 채홍사를 운영하는 등 폭정을 이어갔다.
임사홍은 병조판서에 오르는 등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다만 최근 연구에서는 갑자사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연산군이며, 임사홍의 역할은 후대에 과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임사홍은 왕실과 혼인한 대표적인 외척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둘째 아들 임희재는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가 처형됐고, 임사홍 자신도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여러 차례 질책을 받았다.
즉, 연산군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결국 임사홍은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게 살해됐다.
이후 시신은 다시 파내져 부관참시를 당했고, 재산도 몰수됐다. 그는 조선에서 가장 참혹한 최후를 맞은 대신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된다.
연산군의 폭정을 부추긴 인물, 사화를 이용해 정적을 제거한 간신, 채홍사를 맡아 왕의 향락을 도운 권신이라는 점에서 간신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반면 최근 연구에서는 다른 시각도 제시된다.
갑자사화의 실질적인 주도자는 연산군이었으며, 임사홍이 적극적으로 사화를 기획했다는 직접적인 사료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반정 이후 편찬된 '중종실록'의 정치적 시각이 반영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즉, "간신이었는가"와 "간신으로만 볼 수 있는가"는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그를 "권력에 기대 출세했지만 권력과 함께 몰락한 인물", 그리고 오랫동안 간신의 상징으로 기억해 왔다. 다만 그의 실제 역할과 책임의 범위는 오늘날에도 역사학계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