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무너진 도시…스테프 스미스의 ‘인간동물들’ 국내 초연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작 ‘인간동물들’ / 사진 = 극단 적
【서울 = 서울뉴스통신】 최정인 기자 =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무너진 도시를 통해 생태위기와 인간 중심 사회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연극 ‘인간동물들’이 국내 관객과 처음 만난다.
극단 적은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작 ‘인간동물들’을 오는 8월 21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여행자극장에서 공연한다. 스코틀랜드 희곡작가 스테프 스미스(Stef Smith)가 쓰고 마정화가 번역했으며, 이곤이 연출을 맡았다.
‘인간동물들’은 동물들이 도시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사회 시스템과 인간관계가 흔들리는 과정을 그린 디스토피아 드라마다. 2016년 영국 런던 로열 코트 극장 제루드 시어터 업스테어스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팬데믹 이전부터 인간의 욕망과 자연 훼손이 불러올 위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꾸준히 주목받아 왔다.
작품 속 도시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무너진 공간이다. 쥐들은 벽 사이를 파고들고, 비둘기들은 질병에 감염되며, 여우들은 점차 거리를 차지한다.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도로가 폐쇄되고 공원은 불태워지며 통행금지령까지 내려진다.
하지만 작품은 동물들의 범람 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에 더 집중한다. 인간이 동물을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불안과 공포,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통해 인간중심적 사고를 되짚는다.
기존의 많은 작품이 동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바라봤다면, 스미스는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차별적 대우와 ‘종차별’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동물을 인간을 비유하는 상징적 장치로만 소비하지 않고, 인간 역시 수많은 종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시선을 제시한다. 결국 인간과 동물이 본질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두 존재 사이의 익숙한 경계를 흔든다.
극은 이름 없는 어느 도시의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함께 살아가는 연인 제이미와 리사는 동물들 사이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현상이 퍼지면서 서로의 관계와 가치관을 시험받는다.
동물들이 갑작스럽게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집단 폐사하면서 도시의 질서는 빠르게 붕괴한다. 재난이 심화될수록 사회를 지탱하던 시스템 역시 흔들리고,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믿어왔던 신념과 선택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작품은 대부분 두 인물 사이의 짧은 대화 장면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파편처럼 흩어진 장면이 쌓이면서 도시 전체가 서서히 붕괴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동시에 위기에 놓인 인간들의 고립과 단절, 공포가 부각된다.
특히 극 중간에는 ‘블링크(blink)’라 불리는 시적 장면이 삽입된다. 일반적인 대화 장면 사이를 파고드는 블링크는 코러스와 같은 기능과 음악적 효과를 만들어내며, 환경 재난 속 인물들의 불안정한 감각을 표현한다.
시적 언어 속 이미지는 배우들의 말과 움직임을 비롯해 사운드, 음악, 조명 등 다양한 무대언어로 확장된다. 이를 통해 관객이 사건을 단순히 서사로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불안과 혼란의 감각을 직접 체험하도록 구성한다.
작품에는 인간이라는 종 역시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는 서늘한 인식이 깔려 있다. 인간이 자연을 훼손한 결과가 결국 인간 자신의 존립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자연과 시간은 계속될 것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에도 작품은 완전한 절망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파국 자체를 막지 못할 수 있더라도 그 끝을 어떤 태도로 맞이할 것인지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긴다.
무대에는 영화 ‘서울의 봄’에서 수경사 야포단장을 연기한 송영근을 비롯해 연극 ‘몰타의 유대인’으로 2025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연기상을 받은 곽지숙이 출연한다.
국립극단 ‘태풍’과 ‘갈라진 마음들’, ‘붉은 웃음’ 등에서 활약한 윤성원과 ‘태풍’, ‘만선’에 출연한 성근창도 함께한다. ‘몰타의 유대인’, ‘밤의 사막 너머’의 임윤진과 ‘산재일기’, ‘하우스 소나타’의 정혜지도 무대에 오른다.
작가 스테프 스미스는 동시대 영국 연극계에서 ‘지금 세대의 카릴 처칠’이라는 평가를 받는 스코틀랜드 극작가다. 2012년 ‘로드킬’로 올리비에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고, 2022년에는 TV 시리즈 ‘플로트’로 로열 텔레비전 소사이어티상을 받았다. ‘제비’, ‘로드킬’, ‘인간동물들’, ‘이너프’, ‘리모트’ 등이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연출은 극단 적 상임연출이자 경기대학교 연기학과 교수인 이곤이 맡는다. 이곤은 ‘내가 살던 그 집엔’, ‘스켈레톤 크루’, ‘4분 12초’, ‘햄릿의 비극’, ‘복수자의 비극’, ‘말피’, ‘네더’, ‘벚꽃동산’, ‘바카이’ 등 고전과 동시대 작품을 넘나들며 작업해왔다.
번역과 드라마터그는 극단 적 대표 마정화가 맡았다. 마정화는 ‘스켈레톤 크루’, ‘4분 12초’, ‘햄릿의 비극’, ‘복수자의 비극’, ‘말피’, ‘네더’, ‘러브’ 등 다수 작품의 번역과 드라마터그 작업을 해왔다.
2003년 창단한 극단 적은 ‘말피’, ‘복수자의 비극’, ‘햄릿의 비극’, ‘몰타의 유대인’ 등 르네상스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한편 ‘네더’, ‘4분 12초’, ‘스켈레톤 크루’ 등 동시대 해외 화제작도 국내에 소개해왔다.
특히 ‘몰타의 유대인’은 2024년 서울예술상 연극부문 최우수상과 대상을 수상했으며, 2025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곽지숙은 같은 작품으로 2025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연기상을 받았다.
생태위기와 종차별, 사회 시스템의 붕괴를 하나의 디스토피아적 우화로 풀어낸 ‘인간동물들’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인지, 아니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종에 불과한지를 무대 위에서 다시 묻는다.
‘인간동물들’을 서울 여행자극장에서 오는 8월 21일부터 30일까지 공연한다. 스코틀랜드 희곡작가 스테프 스미스(Stef Smith)가 쓰고 마정화가 번역했으며, 이곤이 연출을 맡았다.